평양성(5)

- 왕험성과 평양성
한나라 무제 유철은 기원전 109 년 위만의 왕험성을 공격합니다. 몇차례의 전투 결과 성과 없는 전장을 지휘할 총감독들을 파견하여 재정비하여 전열을 가다듬어 보지만 결국은 조선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무너집니다. 이윽고 기원전 108 년 조선 땅에 삼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기원전 107 년에는 현토군이 설치됩니다. 이로써 대략 2200 여년 간 이어온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왕험성은
이로부터 약 340 여년이 지나서야 사서에 재등장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왕험성이 아닌 평양성이며 평양성의 주석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서는 바로 삼국사기이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의 기사입니다.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거쳐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신인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이르기를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하였다.`
평양성을 쌓은 곳이 신인 왕검의 택지로 혹은 왕험으로 알려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단군왕검 조선의 도읍이긴 한것 같은데 첫 도읍인 평양성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백악산 아사달이나 장당경으로 볼 근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백악산 아사달이나 장당경 또한 왕의 도읍이라는 왕험성으로 불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양이라는 땅이름이 아무데나 무시로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삼국유사에서 고기를 인용한 첫 도읍인 평양성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단군 왕검 조선의 왕험성. 평양성에 관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단락을 바꾸어서 더 구체적으로 위치를 규명해 보겠습니다.
2) 고구려의 평양성
- 장수왕의 평양성
그러면 정작 궁금한 왕험성인 평양성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무하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동천왕의 평양성 천도 후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이거하고, 다시 평양성 동쪽의 황성으로 재이거합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시에 전방위로 영토를 넖히며 강성기에 들어섭니다. 뒤를 이은 장수왕은 확장된 영토를 기반으로 북위. 남송. 북제 등 지나국들과는 노련하고 자존적인 외교로 안정적 기반을 다지며, 쇠약해지는 북연을 통째로 접수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도한 장수왕의 평양성은 동천왕의 평양성 보다 수명이 더 길고 고구려의 대표적인 도성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래서인지 장수왕의 평양성에 대한 기록이 많고, 따라서 그 위치를 가늠해보기가 수월합니다. 동천왕의 평양성.왕험성이 장수왕의 평양성과 동일한지의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우선 삼국사기 잡지 4 지리 고구려.백제 기록을 보겠습니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인 것 같고 패수는 대동강이 옳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성과 왕험성 사이의 관련성은 기록된 바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단군조선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고조선 왕검조선을 수록한 삼국유사는 위서를 인용한 첫도읍 아사달을 `혹 개성 동쪽 지금의 백악궁이 맞다`라고 하였고, 고기를 인용한 첫도읍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이라고 단정적으로 비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위만조선의 설명글에서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는 왕험의 주에 `이기는 땅 이름이라 했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연스님은 고조선.왕검조선이 개성과 평양을 오간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또 위만이 도읍한 왕험이 낙랑군 내라면 개성이나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왕험성이나 평양성에 대하여 예전이나 현재나 위치 비정은 위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 사학 전문인들이나 두계의 학맥을 잇는 현재의 강단사학 전문인들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자료 수집의 한계나 역사 현장을 지금처럼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고려 당대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읽어보면 김부식과 일연이 비정한 대동강 옆의 평양이나 개성지역을 떠올리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나의 정사와 사찬사서와 주석들을 볼라치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면 지나의 정사와 사서들의 지리서들은 어디라고 했는지 본격적으로 보겠습니다.
우선 고구려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당시의 기록인 구당서를 보겠습니다. 구당서 고려전에
` 고려는 부여의 별종으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한 낙랑군의 고지이다....중략...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은 말
갈에 이른다.` 라고 하였습니다.
위 기록의 평양성이 지금의 대동강 평양시를 묘사한 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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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高句麗本記東川王條21年>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 平壤城移民及묘社 平壤者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三國史記雜志第6地理4高句麗百濟>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卽大洞江是也`

by 백랑수 | 2008/12/04 16:49 | 단군조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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